혁신에 있어서의 계측이 갖는 중요성 (빌게이츠 기고문을 읽고)

맨날 시덥잖은 연예인 소식이나 정치인 언플만 올라오는 네이버 뉴스란에서 문득 볼만한 기사거리가 눈에 띄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빌게이츠가 기고한 칼럼이 실린 것인데 '가장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다' 라는 글이다. "공항에 비밀리에 들어온 수지... 충격!" 이딴 식으로 낚시성 기사나 만들어 올리는 뉴스 다 집어치우고 차라리 해외 경제지를 그대로 번역해서 올리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텍스트를 주욱 정독하는 안하던 짓을 했다.

내용인즉슨, 증기기관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엄청난 혁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확한 계측 기술의 발전이 뒤따랐다는 것을 설명하고 자신이 진행하는 복지사업과 교육사업들에서 유사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내용을 소개한다.

빌게이츠라는 개인적인 인물이 백신개발 같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복지를 하는지 어쩌는지 그런 평가는 논외로 하기로 하고, 일단 혁신과 계측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한다.

현대의 기술개발이라는 것

예전 같았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러 넘겼을 말이지만 회사생활을 어느덧 하고보니 - 그것도 이공계 종사자로서 - 기술 개발에 있어서 정확한 계측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공감을 하게 되었다.

어떠한 아이디어나 차세대 재료등이 선행평가를 거쳐서 검증이 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실현가능한 상업성을 띄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 정밀하고 정량적인 측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원가와 판가 사이의 이익률, 제품이 가지는 신뢰성, 불량율,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의 주요 특성에 대한 측정과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제작 공정상의 산포를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반도체 소자를 기술개발 하는데에 있어서 40나노 공정 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미세패턴을 40나노 단위의 배선으로 만들어서 회로를 꾸민다는 것인데, 이 때 설비로 40나노 패턴을 찍을 수는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찍히는지 어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면 개발을 할 수가 없다.

40을 목표로 찍은 패턴이 정말 40이 맞게 나왔는지, 제 위치에서 얼마만큼 틀어진 위치에 찍혔는지, 목표 오차범위를 벗어난 비율은 얼마인지 등등 품질검사를 위한 여러가지 측정이 정확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측정결과 문제가 있다면 다시 개선 방안을 궁리하고 적용해서 조금씩 조금씩 안정화시켜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개발이다.

무슨 에디슨 위인전에 나오듯이 번쩍 떠오르는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뒤바꾸는 혁신을 쏟아내는 그런 일은 이제는 거의 없다. 이미 수년~수십년 전에 나와있는 특허와 아이디어들을 실제로 제품으로 상용화 시키는데 그에 따라 부가적으로 발생되는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면서 적은 원가로 좋은 품질을 만들어서 팔아야 한다.

대기업들의 업무 행태

 

지금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웠던 애플을 보자. 사실 혁신이라는 이미지는 스티브 잡스라는 만렙 영업사원 CEO의 프레젠테이션 스킬 덕분인 것도 있지만, 기존의 틀에서 탈피해서 N+2, N+3 세대의 단계를 한번에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있다.

그게 단순이 독특한 디자인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애플은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에 깐깐한 스펙을 요구하기로 유명하다. 자체적으로 세운 많으 계측과 반복 평가를 통해 분석하고 피드백해서 지속적인 개선을 요구해오는 것이다.

부품 사다가 조립까지 하청주고 만드는 애플도 그러한데 더욱이 삼성 LG 현대차 같은 제조업을 전통으로 갖는 국내 대기업은 말할것도 없다. 모든 업무는 매뉴얼화 되어 있고 세분화된 부서가 각자 맡은 역할에서 해야될 일을 수행한다.

한 두 명이 빠지고 들어와도 변함없이 굴러가도록 조직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고, 모든 것은 정확한 수치와 데이타로만 이야기된다. '이럴 거 같은데요, 좀 그런데요'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을 썼다가는 바로 머리를 감싸쥐는 상사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수치화된 데이타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괜찮다 싶은 아이디어라도 정작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기존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새로운 개선이 가져오는 효과보다는 그것이 불러오는 기존 성능을 깎아먹는 SIDE EFFECT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

정확한 수치화나 시뮬레이션 같은 수단이 없다면 막무가내식으로 해보다가 방향을 못잡고 배가 산으로 가기 일쑤일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잠재된 문제를 알지 못한채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경우다. 이렇게 끊임없이 수치로 검토하고 검증하고 반복해도 필드에서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그조차 소홀하다면 얼마나 더 끔찍한 일들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품질문제는 아무리 굳건한 브랜드가치를 지닌 기업이라도 한방에 훅가는게 요즘이기에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만 한다.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는 경우에 그것이 안고 있는 품질 문제의 리스크가 있다면 차라리 혁신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애플도 이제 와서는 결국 다른 회사들과 라인업이 겹쳐지면서 비슷한 제품들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 않나. 혁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품질이 보장된 혁신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여러 방면에서 수치화가 갖는 개선의 시너지

 

기술 개발에 있어서의 수치화된 데이타가 가져오는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빌게이츠 기고문을 보면 복지사업과 교육에 있어서 그 효과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별 상관 없어 보이는 분야에서도 정확한 수치 데이타를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가 있는데, 한가지 생각나는 사례가 있어서 소개한다.

예전에 부서에서 업무 효율화를 위한 개선활동이 미션으로 주어진 적이 있었다. 보통은 윗사람이 부하직원들의 업무 고충에 얼마나 신경을 쓰겠냐만은, 이것은 더 윗선의 임원급에서 하달된 업무지시이기에 그 밑에 부서장과 간부들이 줄줄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취지야 어쨋든간에, 그 활동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바로 개인의 하루 일과중 수행한 모든 활동을 수십가지 보기로 만든 것중에 선택해서 기록하는 것이었다.

즉, 나의 하루 업무시간을 식사, 휴식, 회의, 자료작성, 육체작업, 타부서요청사항 수행 등등 매우 세분화된 카테고리에서 골라서 선택해서 채워넣고 취합자에게 보내는 것이다. 얼핏봐도 상당한 뻘짓으로 생각되기에 또 요식행위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취합된 데이타를 통해 직급별 업무형태를 그래프로 수치화 할 수 있었고, 말단 사원일수록 불필요한 육체노동 작업이 많다던지 그게 몇시간 된다던지 정확하게 수치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잔업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업무 때문인지 등등 굉장히 여러가지 방면에서 파악을 할 수가 있어서 일단 분석을 하니까 개선은 간단했다. 원인을 없애버리면 된다.

타부서 불필요한 자료작성 요청이 많다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그 부서랑 협의자리를 마련해서 업무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타협점을 조율한다던지, 육체작업이 많으면 그걸 원래 하는 담당 부서에 요청해서 우리쪽 일도 포함시켜달라고 하거나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없애다보니 몇달 새에 굉장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런 식으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데에도 방문자 통계를 보고 다음 전략을 생각한다던지 할 것이고, 실생활에 자기계발과 시간관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 편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 업무를 줄이는 것의 목적은 그만큼 중요업무를 더 많이 해서 아웃풋을 많이 내라는 주문이다. 씁쓸하지만 결코 편해지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수치화된 데이타에만 의존하는 또 다른 문제

마지막으로 이런 계측에 높은 의존도를 가졌을 때에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특허나 아이디어의 제안이 들어와도 검증 가능성을 기존의 정형화된 툴과 시뮬레이션에 의해 수치화하고 그것만 맹신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보수적으로 접근하다가 정말 대박 혁신의 아이템을 놓칠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품질 문제를 등한시할수는 절대 없으니 어떻게 검증을 강화하면서 아이템 발굴에도 날개를 달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할 논제라고 보여진다.

두번째는 수치만 맞추면 된다는 생각이다. 많은 대기업에서 그렇겠지만 ~~ 지수를 ~~ 까지 달성하라는 식으로 업무 목표가 주어지는데, 듣자마자 알겠지만 여기서 많은 병폐가 생겨난다.

다른 문제들이 있음에도 저 수치만 맞춰서 일단 윗사람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눈가리고 아웅같은 요식행위를 한다던지, 아니면 목표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부서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된다던지 하는 문제점 등이다. 

회사 전체 관점에서 봤을때는 나아진게 없거나 오히려 또다른 불합리가 발생한 것인데도 윗사람은 수치 달성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으니까 그런줄 알고 만족할 것이다. 밑에 사람들은 알면서도 시간도 없고 혼자 그 모든 문제를 개선할 여건도 안되니 그냥 다들 하는대로 지수 맞추기 놀이만 하게 된다.

내가 사장이라면, 나아가 오너라면 그만큼 자원낭비 인력낭비가 되고 심지어 해사행위가 되는 불합리도 발생하는 상황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텐데 말이다.

저 높은 자리에서 수치로 복지사업, 교육사업을 개선해나가고 있는 빌게이츠도 이런 문제점까지 알고 있을까? 뭐 아마 나보다야 훨씬 똑똑하고 경험많은 사람이니 그런 것까지 당연히 알고 조직에서 그런 부분을 개선하는 방법도 많이 해왔지 않을까 싶네. 끝. 

European Pressphoto Agency 빌 게이츠.

참고 : 기고문 원문 주소 (월스트리트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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