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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아르헨티나 대공황과 베어링 은행 파산 위기

금융치료사 피터 2024. 11. 25.

1890년 베어링 은행의 파산 위기는 19세기 후반 최대의 금융위기였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과도한 투자가 부실화되면서 런던의 명문 은행인 베어링이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국제 금융시장이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이는 신흥국 부채위기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배경

1880년대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미국'으로 불리며 급속한 성장을 구가했다.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철도와 항만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뤄졌다.

영국 자본이 이를 뒷받침했는데, 특히 베어링 은행이 아르헨티나 정부와 지방정부의 채권 발행을 주도했다. 1890년경 아르헨티나 대외부채의 절반 이상을 베어링이 인수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차입과 부패한 정부 운영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급속히 악화됐다. 1889년부터 수출이 감소하고 금 준비율이 떨어지면서 페소화 가치가 폭락했다.

정부는 이자 지급을 연체하기 시작했고, 런던 시장에서 아르헨티나 채권 가격이 급락했다. 베어링은 인수한 채권을 제값에 매각하지 못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구제금융 시작

 

1890년 11월, 베어링의 파산 위험이 알려지자 런던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영란은행 총재 윌리엄 리드게이트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로스차일드가의 중재로 영국과 프랑스의 주요 은행들이 긴급 구제금융단을 구성했다. 총 1,700만 파운드의 구제금융이 제공됐고, 베어링은 유한책임회사로 재편됐다. 이는 최초의 국제적 구제금융 사례로 기록된다.

아르헨티나의 대공황

경제위기의 양상
• GDP 40% 감소
• 실업률 60% 상승
• 부동산 가격 50% 하락
• 은행 예금 30% 감소
• 수출 60% 감소
• 화폐가치 70% 하락

구조조정과 회복기

아르헨티나는 1891년 정부와 채권자 간 협상을 통해 부채 재조정에 성공했다. 원리금 지급을 5년간 유예하고, 일부 채무는 장기 채권으로 전환했다.

1899년에는 통화제도를 개혁해 태환을 재개했다. 영국과의 무역관계도 점차 회복됐고, 190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는 다시 고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교훈 포인트

영역 주요 교훈
리스크 관리 단일 국가 위험 집중의 위험성
국제협력 위기 해결을 위한 공조 필요성
채무조정 질서있는 부채 재조정의 중요성
감독체계 국제 금융감독의 필요성

현대적 의의

1890년 위기는 신흥국 부채위기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과도한 외채 의존, 재정규율 약화, 환율 불안, 대외충격 취약성 등은 이후 발생한 수많은 신흥국 위기의 공통 요인이었다.

특히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또한 국제적 구제금융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협력, 채무재조정을 통한 위기 수습, 구조개혁을 전제로 한 지원 등은 현대 IMF 체제의 주요 특징들을 선취했다.

특히 시스템적 중요성을 가진 금융기관의 처리 방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중요한 참고사례가 됐다.

금융시스템의 진화

베어링 위기를 계기로 국제금융 체계는 크게 발전했다. 런던 금융시장의 인수 관행이 개선됐고, 국제적 금융감독 협력의 필요성이 인식됐다.

신흥국 투자에 대한 리스크 관리도 강화됐다. 영란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이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변화들은 현대 국제금융 체계의 기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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