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도 망한 금융위기 사우스시 버블붕괴 사례
- 매크로경제
- 2024. 11. 19.
1720년 영국의 사우스시 버블은 최초의 대규모 주식시장 붕괴 사례다. 남아메리카 무역 독점권을 가진 사우스시 컴퍼니의 주가가 비이성적으로 폭등했다가 폭락하면서, 영국 경제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근대 금융시장 규제의 시발점이 됐다.
버블의 형성 과정
사우스시 컴퍼니는 1711년 정부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설립됐다. 회사는 스페인령 남아메리카와의 독점 무역권을 대가로 정부 부채를 인수했다. 1720년 초, 회사는 나머지 정부 부채도 모두 인수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프랑스의 미시시피 회사가 성공적으로 시행한 존 로의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었다. 발표 직후 주가는 급등하기 시작했다.
투기 열풍은 전 사회계층으로 확산됐다. 런던의 체인지 앨리는 주식 중개인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커피하우스들은 주식 거래소로 변모했다. 귀족들은 땅을 팔아 주식을 샀고, 성직자들은 교회 기금을 투자했다.
심지어 하인들도 주인들의 거래를 모방해 투기에 뛰어들었다. 1720년 6월 사우스시 주가는 연초 대비 8배 이상 상승했고, 시가총액은 영국 GDP의 세 배에 달했다.
버블의 붕괴와 여파
회사 이사진들이 고점에서 자신들의 주식을 매도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안이 시작됐다. 8월 말,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앞다투어 매도에 나섰고, 신용으로 주식을 산 이들은 담보 추가 요구에 응하지 못해 강제 매각당했다.
9월 말까지 주가는 고점의 1/10 수준으로 폭락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정치적 파장도 컸다. 의회 조사 결과, 여러 정치인과 관료들이 내부자 거래와 뇌물 수수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재무장관은 탄핵됐고, 수상은 사임했다. 영국 정부의 신뢰도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아이작 뉴턴도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본 사실이었다. 뉴턴은 "나는 천체의 운동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시장 구조의 변화
사우스시 버블의 붕괴로 영국의 금융시장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1720년 의회는 거품법(Bubble Act)을 제정해 주식회사 설립을 엄격히 규제했다.
이후 100년간 영국에서 주식회사 설립은 의회의 특별법이 필요했다. 투자자들은 정부 채권과 같은 안전자산을 선호하게 됐고, 이는 영국이 안정적인 금융 강국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